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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장기읍성(浦項長鬐邑城)

  • 주소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 127-2번지 외
  • 전화
    054-270-2273
소개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에 위치한 장기읍성(長鬐邑城)은 이 고장의 진산(鎭山)인 동악산(東岳山)에서 동쪽으로 뻗은 등성이에 있으며, 그 구릉 아래쪽으로는 장기천이 동해로 흘러 현내 들판을 형성하고 있다. 일제(日帝)의 잔혹함은 이 읍성에도 밀려 들어와서 성안의 모든 관아(官衙) 등 시설이 파괴되고 단지 향교만이 이 고장 주민들에 의해 복원 유지되고 있고, 성벽은 허물어진 곳이 대부분이었으나 복원 중에 있다.

동ㆍ서ㆍ북문의 터와 수구(水口) 1개소, 12개소의 치성(雉城), 4개소의 우물, 3개소의 못 등이 옛 성의 모습을 그대로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잘 보존되어 있다.산성(산성)과 같은 기능을 겸한 읍성으로서 해발 252m의 동악산(東岳山)에서 해안쪽인 동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지맥 정상(해발 100m)의 평탄면에 축성된 동ㆍ서로 약간 긴 마름모꼴이다. 성 전체의 모양은 연잎 모양의 말굽형이며, 180도 시각으로 동해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쌓았다.1011년(현종 2년) 축성되었는데, 당시 고려가 여진족이 해안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토성(土城)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 1439년(세종 21년)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돌성으로 재축된 후 군사기지 등으로 이용되었다.이 읍성(邑城)은 일찍부터 동해안을 지키는 다른 읍성(邑城)들과 같이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이 그 특성이라 하겠다. 동해안의 중요 진성(鎭城)을 들면 울산(蔚山)의 처용암(處容岩) 지방, 울주군 강동면 정자리 지방, 양남면의 수념(水念) 지방, 감포(甘浦), 이곳 장기, 흥해 칠포 지방들인데 이들 지역은 해안선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펼쳐져 있고 삼국시대에는 서라벌(慶州)을 침공하는 왜구를 방어한 군사기지였고 고려, 조선시대에도 같은 역할을 다하였다.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은 이들 지역과 경주(慶州) 사이에는 산성(山城)들이 있는데 가령 관문성(關門城) 속칭 만리성(萬里城)은 울산ㆍ울주ㆍ양남지역, 양북면의 팔조리산성은 감포지방, 시령(枾嶺 : 감재)산성은 장기지방, 북형산성(北兄山城)은 포항ㆍ흥해지방의 후방방어의 군사거점이였다고 할 때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본다.

시령산성(枾嶺山城)은 포항시 남구 장기면과 경주시 양북면의 경계지점인데 경주에서 옛길을 따르면 감포길을 가다가 추령(楸嶺 : 관해동재)에서 부처재(佛嶺)를 거쳐 기림사(祇林寺) 계곡을 건너면 감재에 이른다. 이곳에 산성이 있고 장기와의 거리는 불과 5~6km 밖에 되지 않는 직행길로 80~90리 정도이다.이 길은 경주에서 동북방향으로 포항과 감포의 중간지점이 된다. 이러한 지리적인 형국(形局)은 장기지방이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장기는 역대에 걸쳐 군사적 요충지로서 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곳 장기의 신라시대 행정구역은 양주(良州) 의창군(義昌郡)에 속한 지답현(只沓縣)이었다. 양주는 원래 삽량으로 지금의 양산(梁山)이고 그 관할구역은 낙동강 하류지방과 동해 남부지방이다. 의창군은 본래 퇴화군(退火郡)인데 경덕왕시대에 의창(義昌)이라 개명(改名)되고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흥해군이라 하였다. 의창군(義昌郡)은 여섯 현(縣)으로 이루어지고 그 관할 지역은 지금의 포항시에 안강읍 지방이 포함된 것이다. 육현(六縣)중에서 지답현(只沓縣)은 경덕왕시대에 기립현(鬐立縣)으로 개명(改名)되고 고려조에는 장기현(長鬐縣)으로 불리웠다. 현종(顯宗) 2년(1011년)에는 동해안(東海岸)의 청하(淸河), 흥해(興海), 영일(迎日), 울주(蔚州) 등과 같이 성(城)을 쌓았고 경주부 속현(慶州府 屬縣)으로 공양왕 시대(恭讓王 時代)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이때의 축성(築城)은 북방의 계원(契圓)세력과 왜구(倭寇)에 대비한 것으로 장기읍성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조선 태종(太宗) 15년(1415년)에 장기읍성의 지리적 중요성에 따라 수령(守令 :현감(縣監))의 위계(位階)를 사품 이상(四品 以上)으로 높여 무신(武臣)으로 고관(高官)을 임명(任命)하여 지현사(知縣事)라 하였다가 세조(世祖) 5년(1460년)에는 독진(獨鎭)으로 되었다가 같은 왕 12년(1467년)에 독진(獨鎭)을 파하였다. 뒤에 현감(縣監)으로 고치고 그 밑에 훈도(訓導)를 두었다. 축성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1. 단종(端宗) 2년(145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성(城)의 둘레가 174보(步)이고 성안에 우물이 두 곳이 있다.
2. 예종(睿宗) 1년(1469년)에 지은 경상도속선지리지(慶尙道續選地理志)에는 세종 21년(1439년)에 돌로 쌓고 둘레가 3,664척이고 높이는 12척이며 샘(泉)이 두 곳이며 못(池)이 두 곳으로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고, 군창(軍倉)도 있다.
3. 중종(中宗) 25년(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석축(石築)을 하고 둘레가 2,980척이고 높이는 10척으로 우물이 네 곳이며 못이 두 곳이다.
4. 구 읍성이 현의 남쪽 2리에 있으며 돌로 쌓아 그 둘레가 468척이고 높이는 12척이고 샘이 두 곳 있다.

이상의 네가지 기록에서 성의 규모를 보면 모두 다르게 되어 있다.

이것은 같은 위치의 성(城)을 여러 대에 걸쳐 중축(重築)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성(城)이 있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축성기록 4항의 구 읍성(旧 邑城)은 뚜렷이 위치가 다르게 나타나 있는데 지금은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움이 남지만 분명히 고려시대(高麗時代) 이전의 고성(古城)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한편 이곳은 벽지로 인정되어 귀양지로도 되었으니 유교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과 실학파(實學派)의 태두(泰斗)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귀양살이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 고장은 송시열을 기리는 죽림서원(竹林書院)이 세워져 글을 읽는 마을이 되었으며 정치ㆍ경제ㆍ사회적인 특성이 있는 곳이 아니고 오로지 국방의 일익을 담당한 군사기지로 그 역할을 다하였던 고장이라 할 수 있다.※ 읍성의 축조방법은 평지읍성, 소구상(小丘上)읍성, 산성적 읍성 등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읍성은 산성적 읍성으로 한국에서는 매우 귀한 존재이며, 현존 유구(遺構)의 보존상태가 좋아 읍성연구에 귀중한 유적이다.
정보
문화재 정보를 지정종목,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나타낸 표입니다.
지정종목 사적 제386호
분류 유적건조물 /정치국방 /성 /성지
수량/면적 120,521㎡
지정(등록)일 1994.03.17
시대 세종 21년(1439)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포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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